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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문라이즈 킹덤 - 어른보다 더 어른 같은 아이들의 도망

by geon-3 2025. 4. 25.

영화 문라이즈 킹덤 포스터 사진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는 단순히 화면이 예쁜 영화로 기억되기 쉽지만,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와 정서는 결코 가볍지 않다. 《문라이즈 킹덤(Moonrise Kingdom, 2012)》은 그런 그의 스타일이 가장 잘 녹아든 작품 중 하나다. 이 영화는 1960년대 미국의 가상 섬을 배경으로, 두 명의 열두 살 소년소녀가 각자의 이유로 집을 떠나 도망치는 이야기를 그린다. 사랑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리고, 모험이라고 하기엔 꽤나 절박한 그들의 여름은 어른인 우리가 잊고 있었던 순수함과 진심을 조용히 꺼내 보여준다. 처음엔 색감과 구도에 눈길이 갔다면, 두 번째 이후엔 감정의 결을 따라가게 되는 영화. 볼수록 깊어지는, 그런 작품이다.

1. 우리 모두 한 번쯤 꿈꿨던 도망

영화는 미국 동북부에 위치한 가상의 섬, 뉴 펜잔스(New Penzance)에서 시작된다. 1965년 여름, 보이스카우트 캠프에 속한 고아 소년 샘 섀커스키(Sam Shakusky)는 조용히 텐트를 빠져나온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편지를 통해 미리 약속해둔 장소. 그곳에는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가던 소녀 수지 비숍(Suzy Bishop)이 기다리고 있다. 둘은 오랜 시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알아갔고, 마침내 함께 섬 어딘가로 도망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샘은 생존 기술이 뛰어난 소년으로 텐트, 칼, 낚시 도구 등 도망에 필요한 도구를 챙긴다. 수지는 자신의 애완 고양이, 가장 좋아하는 책들, 쌍안경을 담은 여행 가방을 들고 나온다. 그들은 섬의 깊은 숲 속에 은신처를 만들고, 외부와 단절된 채 그들만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진지하고 섬세하게 서로를 보듬는 두 사람의 모습은, 단순한 '도피' 이상의 감정을 담고 있다. 샘은 수지에게 춤을 가르치고, 수지는 샘의 얼굴을 바라보며 묻는다. "내가 이상해?" 샘은 대답한다. "나도 그래." 그 짧은 대화는 둘의 유대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이들의 실종 사실은 금세 마을에 알려지고, 어른들은 혼란에 빠진다. 수지의 부모, 경찰 샤프 대위(Bruce Willis), 보이스카우트 리더 워드(Edward Norton)는 아이들을 찾기 위해 섬 전체를 수색한다. 하지만 이 어른들 중 누구도 아이들이 왜 떠났는지,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지를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않는다. 이 모든 상황은 폭풍이 몰아치는 클라이맥스에서 격렬하게 맞부딪히고, 샘은 다시 고아원으로 보내질 위기에 처한다. 그때 샤프 대위는 샘의 법적 보호자가 되겠다고 선언하며 아이를 구한다. 이 장면은 감정적으로 가장 진한 울림을 주며, 어른이 되어야 할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되묻는다.

2. 어른 같던 아이, 아이 같은 어른들

샘과 수지는 흔히 말하는 ‘이상한 아이들’이다. 샘은 고아로서 여러 시설을 전전했고, 수지는 부모와의 소통 단절로 심리적 거리를 느끼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 두 아이는 자신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솔직하고 정직하다. 감정을 숨기기보단 꺼내놓으며, 상대를 판단하기보다는 이해하려 한다. 샘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도망을 감행하고, 수지는 자신을 온전히 바라봐주는 존재를 찾아 떠났다. 단지 호기심이나 반항심 때문이 아닌,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감정을 느껴버린 아이들의 결단이었다.

반면 어른들의 세계는 복잡하고 무기력하다. 수지의 부모는 서로 대화하지 않고, 가정은 형식적이다. 경찰 샤프 대위는 외로운 남자로, 스스로에게조차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살아간다. 스카우트 리더 워드는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사람이지만, 상황이 예상 밖으로 흘러가자 무력감을 드러낸다. 이 영화는 아이들의 순수함과 어른들의 불완전함을 대비시킨다. 아이들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동안, 어른들은 그것을 제도와 규칙 속에 가두려 한다.

특히 샘과 수지가 함께 나누는 짧은 키스 장면이나, 사라져가는 텐트 안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는 장면은, 단순한 ‘어린 연애’라기보다는 ‘연대’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정도로 깊은 울림을 준다.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피난처였고, 그것이 곧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3. 웨스 앤더슨의 방식으로 만든 작은 동화

《문라이즈 킹덤》은 웨스 앤더슨 감독의 미장센과 내러티브 구조가 가장 잘 어우러진 작품 중 하나다. 그는 익히 알려진 대칭 구도, 파스텔톤의 색채, 정적인 카메라 무빙을 통해 마치 ‘인형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 형식적인 아름다움은 이야기와 정서를 결코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의 감성은 그 형식을 통해 더 깊게 전달된다.

배경은 단순한 시골 마을이지만, 각각의 공간들은 독립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수지의 집, 스카우트 캠프, 등대, 숲속 은신처까지 모든 장소는 마치 하나의 연극 무대처럼 설정되어 있다. 인물들의 동선 하나하나까지 철저히 계산되어 있고, 이러한 디테일은 관객이 이야기보다는 감정을 더 깊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알렉상드르 데스플라(Alexandre Desplat)의 스코어는 감정선을 부드럽게 이끌며, 벤저민 브리튼(Benjamin Britten)의 클래식과 포크 음악들이 섞여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풍성하게 한다. 또, 밥 밸러번(Bob Balaban)</strong)이 내레이터로 등장해 마치 동화를 들려주는 듯한 톤으로 전체 이야기의 프레임을 잡아주는 것도 웨스 앤더슨 특유의 연출 기법이다. 이로 인해 이 영화는 현실이 아닌 ‘현실처럼 보이는 상상 속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4. 누군가와 도망치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면

《문라이즈 킹덤》은 성장 영화인 동시에 이별, 외로움, 소속감, 가족이라는 다양한 주제를 품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어린이들의 탈출극 같지만, 그 안에는 어른보다 어른스러운 감정과 선택들이 숨어 있다. 이 영화는 사랑이 꼭 나이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한때 가졌던, 혹은 지금도 갖고 있는 내면의 어린 감정들을 조용히 꺼내어 다시 마주하게 만든다.

지금 이 영화를 보면 그 시절의 내가 떠오를 수도 있다.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꼈던 그 시간, 누군가와 손잡고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었던 마음. 《문라이즈 킹덤》은 그런 감정들을 진지하게 꺼내 보여주며, 그 순간들이 결코 유치하거나 사소하지 않았다고 말해준다. 단순한 예쁜 영화가 아닌, 마음 깊은 곳에 오래 남는 이야기다.